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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란? 조선시대 탄원제도 정리

by newthing-1 2025.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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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절대 권력을 가졌던 조선시대, 무려 1만 명에 달하는 유생들이 하나의 문서에 서명하여 왕에게 자신들의 뜻을 전달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이는 단순한 건의를 넘어, 때로는 왕의 정책 방향을 바꾸고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기도 한 강력한 정치 행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인소(萬人疏)'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연구하며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이 만인소가 왕조 국가 체제 내에서 백성의 목소리, 즉 민의를 표출하는 거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극적인 수단이었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왕도 무시할 수 없었던 1만 유생들의 함성, 만인소의 모든 것을 전문가의 시선으로 깊이 있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만인소
만인소

 

만인소 핵심 요약

구분 핵심 내용
정의 조선시대 약 1만 명의 유생들이 연명하여 올린 집단 상소문
주요 목적 정부 정책에 대한 강력한 반대 또는 의견 개진 (예: 사도세자 신원, 개화정책 반대)
주도 세력 초기에는 성균관 유생, 16세기 중엽 이후 지방 유생(특히 영남 유생)이 주도
역사적 의의 권력 견제 및 민의를 반영하는 소통 창구, 조선 후기 사회·정치 갈등의 기록
문화재적 가치 2018년 '만인의 청원, 만인소'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 등재

만인소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만인소(萬人疏)는 글자 그대로 '1만 명의 사람이 올린 상소'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萬)'은 정확히 1만 명을 의미하기보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조선시대 지식인 계층이었던 유생들이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뜻을 모아 집단으로 왕에게 올린 상소문을 말합니다.

 

개인이나 소수가 올리는 일반 상소와는 그 규모와 파급력에서 차원이 달랐습니다. 만인소는 특정 학파나 지역의 유생들이 여론을 형성하고, 이를 거대한 문서에 연이어 서명(연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며 왕과 조정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강력한 압박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대표적인 만인소 사건들: 역사를 바꾼 목소리

역사 기록에 따르면 총 7차례의 만인소가 있었으며, 그중 몇몇은 조선 역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792년(정조 16년)에 올라온 '영남 만인소'입니다. 이 만인소는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신원(누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시킴)을 주장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영남 유생 10,057명이 연명하여 올린 이 상소는 정조에게 큰 감동과 정치적 명분을 주었고, 훗날 사도세자 추존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후 1880년대에는 서구 문물 개방에 반대하는 '위정척사' 운동의 일환으로 영남 유생들이 두 차례에 걸쳐 만인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급변하는 시대상에 대한 보수 유생층의 위기의식과 강력한 저항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됩니다.

 

만인소는 어떻게 작성되고 전달되었을까?

만인소를 준비하는 과정은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었습니다. 먼저 상소를 주도하는 대표 유생(소수, 疏首)을 뽑고 상소의 내용을 작성합니다. 이후 각 지역에 사람을 보내 유생들의 서명을 받기 시작합니다. 1만 명의 서명을 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수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습니다.

 

모든 서명이 끝나면 두루마리 형태로 이어진 상소문은 그 길이가 무려 100미터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만인소는 대표 유생들이 직접 한양으로 가지고 가 대궐 앞에서 엎드려 왕에게 전달될 때까지 기다리는 '복합상소(伏閤上疏)'의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겠다는 비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만인소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만인소는 조선이 왕조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여론 정치와 공론을 중요시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자산입니다. 왕의 권력에 대한 유일한 견제 수단이었으며, 지방 지식인들이 중앙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조선 사회가 일방적인 통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배층과 피지배층(비록 유생이라는 한정된 계층이지만) 간의 소통과 갈등 조절 메커니즘이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참여 계층이 유생으로 한정되어 있고, 때로는 특정 정치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명확한 한계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만인소는 당시의 시대정신과 사회적 갈등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귀중한 기록물임이 틀림없습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기록유산, 만인소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만인의 청원, 만인소(Petitions by the People, Maninso)'라는 이름으로 2점의 만인소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등재된 만인소는 1792년 사도세자 신원 상소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정책에 반대한 상소입니다.

 

유네스코는 만인소가 집단 청원 문화의 독창성과 그 기록물의 희소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는 만인소가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기록유산임을 공인받은 쾌거입니다. 현재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소중하게 보관 및 연구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탄원 제도: 만인소는 어떻게 가능했나?

만인소와 같은 집단행동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조선의 독특한 탄원 제도가 있습니다. 조선은 법적으로 왕에게 상소를 올릴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습니다. 관리뿐만 아니라 성균관과 지방 향교의 유생들, 심지어 일반 백성들도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신문고나 꽹과리를 쳐서 의견을 표출할 수 있었습니다.

 

만인소는 이러한 상소 제도가 유생 사회의 공론 문화와 결합하여 나타난 가장 극적인 형태였습니다. 물론 왕의 심기를 거스르는 상소는 주동자가 처벌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올바른 말'을 하는 것을 선비의 도리로 여겼던 문화 속에서 만인소는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조선의 통치 시스템이 가진 유연성과 개방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A

Q. 만인소에 일반 백성도 참여할 수 있었나요?

A. 아니요, 만인소의 연명자는 기본적으로 유생, 즉 성리학을 공부하는 지식인 계층으로 한정되었습니다. 이는 글을 알고 상소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Q. 만인소를 올리면 항상 받아들여졌나요?

A. 아닙니다. 왕의 정치적 판단이나 당시 정세에 따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했습니다. 1792년 사도세자 신원 만인소는 정조가 긍정적으로 답했지만, 개화정책에 반대한 만인소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Q. 만인소를 주도한 사람은 처벌받지 않았나요?

A. 상소의 내용에 따라 달랐습니다. 왕이나 조정에서 상소의 내용이 매우 불충하다고 판단할 경우, 주동자인 소수(疏首)를 유배 보내는 등 처벌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인소를 이끄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Q. 왜 특히 영남 지역에서 만인소가 많이 일어났나요?

A. 영남 지역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남인 세력의 근거지로, 학문적 자부심과 결속력이 매우 강한 곳이었습니다. 중앙 정치에서 소외되었을 때,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학문적 입장을 만인소라는 집단행동을 통해 표출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Q. 만인소 원본은 직접 볼 수 있나요?

A. 네, 원본은 보존을 위해 특별 관리되지만, 한국국학진흥원 등에서 주최하는 특별 전시나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만인소의 이미지나 복제본을 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네스코 등재 이후 관련 전시에 공개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Q. '만인소'와 일반 '상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A. 가장 큰 차이는 '규모'와 '상징성'입니다. 일반 상소는 개인이나 소수의 관리가 올리는 반면, 만인소는 수천에서 만 명에 이르는 유생들이 연명합니다. 이 엄청난 규모 자체가 왕과 조정에 보내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였습니다.

Q. 1만 명의 서명을 받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A.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수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대표 유생들이 상소문을 작성한 뒤, 지역별로 역할을 분담하여 말을 타고 다니며 서명을 받았다고 하니,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 과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Q. 만인소에 드는 비용은 누가 부담했나요?

A. 만인소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경비(종이, 붓, 먹, 인력 이동 경비 등)는 주로 해당 지역의 부유한 유생들이나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자발적인 기부로 충당되었습니다. 이는 만인소가 강력한 목적의식과 경제적 기반 없이는 불가능했음을 보여줍니다.

Q. 여성도 만인소에 참여했나요?

A. 안타깝게도 공식적인 참여 기록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사회 구조상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은 극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만인소의 연명자는 모두 남성 유생이었습니다.

Q. 현존하는 만인소 두루마리의 길이는 어느 정도인가요?

A. 1792년 영남만인소의 경우,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길이가 96.5미터에 달합니다. 이는 만인소의 물리적인 규모와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람의 염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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